교육에 대하여

無賴漢/共感 | 2008/11/02 22:56 | 무뢰한

현재 내가 아는 한, 교육 문제에 대한 가장 예리한 글이라 생각되어 올린다. 물론, 이보다 더 좋은 글이 있을 수도 있고, 이 문제에 대한 내 생각도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지성은 언제나 보다 나은 것을 상상할 수 있으므로, 우리의 사고방식과 생활양식도 언제나 개선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특정 사고방식을 강요하는 모든 것에 단호하게 반대하려는 용기를 원한다.


학교교육의 횡포 - 존 테일러 개토

사고력을 박탈하는 학교

여러분에게 멍청함에 대하여 이야기하겠다. 그것이 학교가 제일 잘 가르치는 것이니까. 옛날의 멍청함은 단순한 무지, 즉 어떤 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알려고 하면 알 수가 있었다. 정부에 의해 통제되는 학교교육은 멍청함을 없애지 못했다. 사실, 지금 우리는 사람들이 학교교육을 강요당하기 이전에 더 유창하게 글을 읽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오늘날 멍청한 사람은 단순한 무지한 것이 아니라 진부한 개념을 생각없이 받아들임으로써 생긴 피해자이다. 지금 멍청한 사람들은 <타임>지와 CBS, <뉴욕타임스>와 대통력의 견해에 대해 정통해있다. 그들의 일은 남들이 한 생각, 얻어들은 의견들 중에서 어느 것이 제일 마음에 드는지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무지의 제국에서 남들의 생각을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 엘리트이다.

대규모의 멍청함은 현대사회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멍청한 사람은 시장조사자, 정부의 정책결정자들, 여론주도자들, 그리고 다른 이익집단들이 심리적 조작을 하기에 아주 좋은 유순한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이 남들의 생각을 많이 기억하고 있으면 있을수록 그가 어떤 선택을 할는지 예측하기가 더 쉽다. 스스로 생각을 하거나 오랫동안 미칠 것 같은 기분을 느끼지 않고 혼자 있는 일은 멍청한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이다.

진정한 지식은 힘들고 고통스러운 사고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집단토의나 집단치료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고 오직 혼자만의 외로운 시간에서만 생겨난다. 진정한 지식은 끊임없는 질문에 의해서만, 그리고 독립적인 확인의 노동에 의해서만 얻어진다. 그것을 정부요원이나 사회사업가, 심리학자, 면허 받은 전문가, 또는 학교선생에게서 살수는 없는 것이다. 이 나라에는 진정한 지식의 발견을 허용하도록 세워진 공립학교는 없다. 가장 좋은 학교라 해도 그렇다. 여기저기에 마치 게리랄 투사들처럼 외롭게 체제에 반발하고, 이러한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교사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러나 학교란 사람을 개별적인 존재로 보기보다 사람들을 분류하기 위해서 세워진 것이므로 가장 좋은 교사들이라도 그들이 참을 수 있는 질문의 양에는 엄격한 한계가 있다.

새로운 멍청함 - 수용된 개념에 대한 무사고-은 단순한 무지보다 훨씬 위험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고를 통제하는 일에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개인의 타고난 정신의 힘을 씻어 없앤다. 이 '세척'이 너무도 포괄적이기 때문에 독창적인 사고는 어렵게 된다. 이것이 학교교육이 의도적으로 수행하는 일의 일부임을 믿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윌리엄 토레이 해리스의 <교육의 철학>을 읽어보아야 한다. 해리스는 1990년경에 미국의 최고위 교육행정가였고 미국의 학교들을 규격화하는데 가장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백명 중 아흔아홉명(의 학생)은 조심조심 정해진 길을 따라 걷고 정해진 관습을 따르는 자동인형들이다"라고 해리스는 쓰고 있다. 이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실질적인 교육의 결과인데, 과학적으로 정의하자면 교육은 개인의 평준화이다"라고 해리스는 설명한다.
과학적 교육은 개인을 말살하여 그 사람이 로봇처럼 행동하게 만든다. 그것이 이제까지의 가장 영향력있는 미국 교육행정가의 생각이다.

위대한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나치즘에 대한 그의 뛰어난 분석에서 이 새로운 멍청함의 문제를 제기했다. 그는 어찌해서 세계에서 학교교육이 가장 잘 되어있는 나라인 독일이 나치즘의 지배하에 떨어지게 되었는지 알아보려고 하였다. 그는 나치즘은 오직 좋은 학교교육의 심리학적 산물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받아들여진 개념들, 남들이 이미 다 해놓은 생각들의 무게가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개인들은 스스로 사물을 평가하려는 노력을 포기해버렸다. 학교에 대중전달매체들이 기성품으로 된 생각과 판단을 수없이 많이 제공하고 있는데 왜 그것을 스스로 하려고 애쓴단 말인가?

새로운 멍청함은 순응을 강요하는 수많은 요구에 의해 이미 경박스럽게 되어있는 중산층이나 중상류 사람들에게 특히 심각하다. 학위나 졸업자격, 혹은 면허 때문에 자기들이 무엇인가를 틀림없이 알고 있다고 불안하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가 이혼을 하거나 아이들과 멀어지게 되거나 실직을 한다든지 혹은 삶이 허무하다는 느낌이 주기적으로 찾아들 때, 그러한 것이 그들의 불완전한 인간성과 그들의 불구적인 삶의 위태로운 균형을 깨뜨려놓는 것이다.
 

쓸모있는 교육

나는 좋은 학교을 잴 수 있는 잣대, 황금의 원칙을 제시하려 한다. 메인 주 배스에 있는 셀터연구소는 여러분의 나이에 상관없이 3주일 동안에 3천 평방피트의 여러 층으로 된 집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 줄 것이다. 한 주일을 더 보내면 여러분 스스로 기둥과 서까래를 만드는 방법을 보여줄 것이다. 실제로 나무를 잘라서 세울 수 있게 된다. 전기배선, 배관, 단열재 설치, 실제작업을 배울 것이다. 2만명이 그곳에서 공립학교의 한 달 학비를 내고 집짓는 방법을 배웠다. 그리고 거의 같은 돈을 내면, 메인 주 해양박물관의 도제과정에서 1년 과정의 전통적인 목선 제작법에 등록할 수 있다. 전체 수업료는 800달러이지만 한 가지 이점이 있다. 즉, 두 주일동안 자원봉사를 한 사람만을 수강생으로 받아준다는 점이다. 이제 여러분은 13개월과 1,500달러를 투자해서 집과 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밖에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채소 키우기, 옷 만들기, 자동차 수리, 가구 만들기, 노래 부르기인가? 여러분 중에 역사적 상상력을 가진 사람은 학교교육에 대한 토머스 제퍼슨의 기도, 즉 학교는 쓸모있는 지식을 가르쳐야 한다라는 것을 생각해낼 것이다. 실제로 어떤 곳에서는 쓸모있는 지식을 가르치고 있다. 오늘날 미국에서 가장 좋은 교육은 박물관, 도서관 그리고 사설기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누구든 당신의 아이를 교육하고자 한다면 셀터연구소의 기준에 맞추라. 그러면 잘될 것이다.

셀터연구소는 여러분에게 훌륭한 집을 갖게 하는 데 몇주밖에 요구하지 않는다. 메인 주 해양박물관은 배 만들기, 밧줄 만들기, 새우잡이, 돛 만들기, 물고기 잡기, 해양건축을 가르치는 게 몇달밖에 걸리지 않는다. 우리에게 학교교육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지나치게 많다. 학기가 짧은 홍콩은 모든 과학이나 수학 경연에서 일본을 능가한다. 학기가 긴 이스라엘이 전세계에서 가장 짧은 학기를 가진 벨지움을 따라가지 못한다.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유하고 건강하고 아름다운 나라, 모든 것에서 높은 질을 자랑하는 스웨덴은 아이들이 일곱살이 되기 전에는 학교에 들어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스웨덴의 학교 교육기간은 12년이 아니라 9년인데, 그것을 마친 평균적인 스웨덴 사람은 학교교육을 너무 많이 받은 미국인들보다 낫다. 어째서 여러분은 이 사실들을 모르고 있는가? 여러분이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익을 보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스웨덴의 학교에 입학을 하면 학교당국은 아이에게 세 가지를 묻는다. (1) 왜 학교에 다니려고 하는가? (2) 그 경험으로부터 무엇을 얻기를 원하는가? (3) 네게 흥미있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고 나서는 이제 학부형들이 교사에게 질문한다. 당신은 집이나 배를 지을 줄 아는가? 당신은 채소를 키우고, 옷을 만들고, 우물을 파고, 노래를 부르고, 당신 자신의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당신 주위 일상의 세계로부터 온전한 삶을 이루어낼 수 있는가? 아니라고?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내 아이를 가르칠 수는 없다.

나 자신의 인생에서나 내 아이들에 관련해서나 나는,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고 다녀야 했던 헤스터 프린이 청교도 장로들이 자기의 딸을 빼앗아가려 했을 때 그들에게 한 말을 할 용기가 없었던 것을 애석하게 생각한다. 적대적인 사람들에 둘러싸여 친구도 없이 혼자서 누추하게 지내는 그 여자는 "내가 죽기 전에는 안되요"라고 말했다. 2,3주 전에 펜실베이니아 스트라우즈버그에서 한 젊은 부인이 내게 전화로, 자기의 어린 딸 크리시를 집에서 교육하는 것을 중단하라고 주정부가 통보해왔다고 말했다. 정부는 강제적으로 크리시를 학교에 보내겠다는 것이다. 그 여자는 어떻게 비용을 대야 할지는 모르지만 싸우겠다고 말했다. 우선 법으로 그러고 나서는 무슨 방법으로든지. 이 젊은 어머니와 펜실베이니아 주정부 중 누가 이길지 내기를 걸라고 한다면 나는 그 어머니에게 걸겠다. 그 여자의 말 속에서 내가 들은 것은 "내가 죽기 전에는 안되요"라는 말이었으니까. 정부가 내 아이를 데려가려 했을 때 내가 그 말을 할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나는 꼭 그렇게 말할 참이다.
며칠 전에 한 신문사에서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시키려는 부모들에게 조언을 해달라는 전화가 왔다. 기자가 원한 것은 뉴욕 주 '올해의 교사'였던 사람에게서 건전한 정보를 듣자는 것이었다. 나는 이렇게 말했다.

"학교가 당신과 직접 진심으로 의논을 하러 오지 않거든 -학교위주가 아니라 당신 위주로- 아이들의 학교에 협조하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만이 아이들을 시험해보지도 않은 낯선 사람들에게 무조건 맡겨놓고 최선의 결과가 나오리라고 희망할 것입니다. 부모와 학교당국이 적수라는 건 명백합니다. 한쪽은 생계를 벌려고 하고 다른 쪽은 가족이라는 예술작품을 만들려고 합니다. 만일 당신이 아첨에 속아넘어가거나 특별학급이나 학습계획 같은 쓸데없는 것에 꼬임을 당하거나 무언지 모를 자격증이나 학위 등에 겁을 먹거나 한다면 당신은 내부의 적이 되어 국가의 학교교육을 당신의 가정에까지 연장시키게 될 것입니다. 그것을 허용한다면 수치스러운 일이 될 것입니다. 당신은 사랑을 위해 일하지만 교사는 돈을 위해 일합니다. 관심사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한쪽은 개별적인 것인데, 다른 쪽은 집단적인 것입니다. 당신은 그렇게 할 시간과 의지가 있다면 당신의 자녀를 독자적인 사람으로 만들 수 있지만 학교는 아이들을 오직 가축이나 벌떼나 개미무리의 한 부분으로 만들 수 있을 뿐입니다."


교육을 위한 사보타지

내가 그토록 반감과 혐오감을 느끼는 제도 속에서 어떻게 거의 30년이나 살아왔느냐고? 나는 다른 교사들에게 전략을 제시하고자 하는 희망에서 고백을 하려고 한다. 나는 소규모로 혹은 대규모로 활발하게 사보타지를 행해홨다. 내가 단호하게 해온 것은 내가 여기에서 말하는 것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일이었다. 즉, 학교교육이 집을 짓거나 배 만들기를 가르치지 않으면 그것은 나쁜 일이라는 것, 낯선 사람들에게 너 자신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알려주면 확실히 그 사람들에게 유리하게 되지, 너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 말이다.

일상적으로 나는 의식적으로 사보타지를 했다. 정기적으로 규칠을 어기고, 학교교육의 정해진 시간과 공간을 융통성있게 만들고, 경직된 교과과정이지만 학생들 개개인에게 쓸모있는 것이 되도록 성적 기록을 조작하였다. 나는 새로운 교사들이 행정의 피라미드에 끼어들지 않기 위해 변증법적으로 사고하도록 고무함으로써 기계장치에 모래를 던져넣었다. 나는 학교의 징벌제도의 약점을 이용했다. 학교의 징벌 메커니즘이란 전혀 쓸모가 없는 것인데 나는 보이지 않는 방법으로 그것에 도전하고, 내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행정관리자들을 서로 대립하게함으로써 그 거대한 괴물이 나를 짓뭉개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것으로 되지 않을 때는 사업가, 정치가, 부모들, 기자들 같은 지역 사회의 힘들을 동원해서 운신의 폭을 넓게 했다. 한번은 내가 심한 공격을 받고 있을 때 나는 아내에게 학교의 이사로 출마하도록 부탁했다. 아내는 이사로 선출되어 교장을 해임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학교제도에 대한 아이들의 신뢰를 무너뜨리고 그 대신 아이들 자신의 생각과 마음에 대한 자신감을 심어주었다는 것이다. 나는 월리엄 토레이 해리스를 비웃고 내 아이들에게 어른시절 푸른 모논가헬라강과 철강 도시 피츠버그가 내게 준 것을 주었다. 그것은 가족과 친구들과 문화와 이웃에 대한 사랑, 그리고 넘치는 자존심이었다. 내가 가르친 아이들 중 몇명은 학교를 떠나 아마존강 상류로 가서 인디언 부족들과 함께 살면서 정부의 댐 건설이 전통적인 가족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독자적으로 연구하였다. 몇몇은 니카라과로 가서 전투에 가담하여 민중들의 삶에 시가 차지하는 놀라운 힘을 연구하였다. 몇몇은 영화를 만들어 상을 받았고, 몇몇은 코미디언이 되었고, 몇몇은 사랑에 성공했고 몇몇을 실패했다.


학교의 과학과 진짜 과학

교사자격증이라는 환상을 생각해보자. 교사들은 전문가이기나 한 것처럼 자격증을 받고 그에 따른 봉급을 받는다. 그러나 실제로 전문가인 경우는 드물다. 예를 들어, 과학교사가 과학자, 즉 자연의 신비에 대한 열정을 지니고 자신의 시간에 이런 관심사를 추구하는 사람인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나라의 과학 학급이 무엇을 발견하거나 인간의 지식을 증가시키려는 진지한 노력을 실제로 하는 경우가 몇이나 되는가? 그것들은 시간을 죽이는 정돈된 방법일 뿐, 그 이상은 아니다.

아이들은 낡아빠진 과정을 되풀이하며 과학용어를 외운다. 텔레비전에서 상업광고를 따라하게 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공식을 따라 외운다. 과학교사는 국가가 인정한 과학교과서에 수록되어 있는 정치적인 진리를 선전하는 사람이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과학이 진짜 과학에 꼭 필요한 예비과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말 몹시 순진한 사람이다. 텔레비전이 남의 눈을 통해 본 모습, 남들이 해본 생각, 그리고 불건강한 환상을 제공함으로써 사람의 사고능력을 파괴해버린다는 것을 알면서도 PBS공영텔레비전은 예외일 거라고 믿는 가련한 지식인들도 어리석기는 마찬가지이다.

만일 과학자들이 정말로 어떻게 배출되는지를 알고 싶다면 1989년에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나온 <발견>이라는 멋진 책을 보라. 그걸 보면 초전도 같은 것을 포함해서 금세기의 주요 과학발견 중 단 하나도 대학실험실이나 기업이나 정부실험실이나 학교실험실에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모든 과학적 발견은 차고, 다락방, 지하실 같은 데서 나왔다. 그것들은 모두 값싸고 단순한 장치와 괴팍한 개인적인 탐구과정에서 이루어졌다. 학교는 과학을 종교로 바꾸어놓기에는 완벽한 장소이지만, 과학을 배우기 위해 적합한 곳이 아닌 것이 확실하다.

영어, 수학, 사회과학 그리고 다른 여러 진보적 과목의 전문가들도 별 차이가 없고 낫다고 해도 그저 조금 나을 뿐이다. 삼백만명이나 되는 교사들이 그들의 자격증이 주장하는 대로 정말 전문가들이라면 그들은 국민 생활과 정책결정에 중요한 목소리가 될 것이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그토록 큰 집단이 '학교식의 경영'에 대한 새로운 허튼 소리가 퍼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그렇게나 영향력이 없는 것을 이상하게 여겨야 할 것이다.

나의 말을 오해하지 말라. 교사들은 흔히 선량한 사람이고 열심히 일하는 지성적이고 재능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명석하고 아무리 멋지게 '학교교육'을 하고 또는 아이들의 행동을 아무리 잘 통제하든 간에 (결국 바로 이것 때문에 그들이 고용되는 것이다. 이것을 하지 못하면 해고되고 이것을 할 수 있으면 다른 것은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과 우리의 지출의 순전한 결과는 아주 미미하거나 아무것도 아니다. 사실, 흔히 아이들은 지적 발달이나 성격 형성의 면에서 '가르침'을 받기 전보다 더 나빠지는 경우가 많다. 성공적으로 보이는 학교들은 거의 언제나 스스로 학습동기를 가진 학생들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프러시아와 미국의 유대관계

강제적 학교교육이라는 이상한 세계로 들어가는 최선의 방법은 책을 통한 것이다. 나는 항상 진짜 책과 학교 교과서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뉴욕 시의 공허한 영어 교과과정이 지겨워서 내가 8학년의 영어시간에 <모비딕>을 가르치기로 결정하고서야 세부적인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의 45분짜리 수업시간을 위해서는 그 '흰 고래'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거기에 '맞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교과서용 <모비딕>의 편집자들은 미리 만들어진 질문 꾸러미와 거의 백 개나 되는 그들 자신의 해설을 제시해놓고 있었다. 매 장의 아뒤에 이들이 개입하고 있었다. 나는 교과서용 책은 진짜 책이 아니라 위장된 교화 도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책은 어떤 선생이 가르치든 어떤 학생이 배우든 똑같은 것으로 되어버렸다.

가르치는 사람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도록 의도된 이 그림 짜맞추기 같은 교과서는 불길한 천재 프레드릭 테일러가 세기 전환기에 쓴 <과학적 경영>에서 유래한다고 보통 생각하지만, 실은 그렇지 않다. 그러한 제도는 미국 혁명 이전, 18세기 프러시아에서 프레데릭 대왕이 고안했으며, 1806년에 프러시아가 나폴레옹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당한 후 19세기 프러시아에서 완벽하게 다듬어졌다. 이 새로운 학교제도, 유연한 어린 시절동안 인간을 믿을 수 있는 기계의 부속품으로, 국가로부터 임무와 목적을 부여받은 인간기계로 만들어버리는 제도는 프러시아가 복수를 행하기 위해 만들어낸 도구였다. 블루커의 해골 경기별들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쳐부셨을 때 프러시아 학교교육의 가치가 확인되었다.

1819년에는 이미 프러시아가 최초의 강제적 학교교육의 실험실을 세상에 제공하였다. 바로 그 해에 메리 셀리가 시체의 부분들을 모아서 괴물을 만들어낸 독일 지식인의 이야기인 <프랑켄슈타인>을 썼다. 강제적 학교교육은 메리가 염두에 두고 있던 괴물이었다. 자신의 창조자를 찾은 이 집 없는 합성의 피조물, 출신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초래하는 무한한 내면의 고통을 갖고 있는 이 피조물이 일으키는 파괴가 그것을 상징하고 있다.

19세기에 프러시아와 미국의 유대관계는 매우 긴밀했다. 이 사실은 세계대전 동안에 우리를 난처하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역사책에서 삭제되었다. 19세기 동안 미국의 최고수준의 학문은 거의 전적으로 독일적이었다.(이것도 편의적으로 일반역사에는 빠져있는 사실이다.) 1814년에서 1900년까지 미국의 저명한 집안 출신의 5만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가르침'보다는 연구에 기초를 둔 새로운 고등교육기관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프러시아와 독일의 다른 지역으로 순례를 떠났다. 일만명이 박사학위를 가지고 그때까지 학위제도가 없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대부분의 지적, 기술적 일을 선점하였다.

프러시아의 교육은 미국의 정치지도자, 산업가, 성직자, 대학인들에게 강박관념이 되었다. 1845년 프러시아 황제는 미국과 캐나다의 경계선을 판정해달라는 요청을 받기까지 했다. 사실상, 미국의 의무교육 설립자들은 모두 기계장치 같은 교실들을 직접 연구하기 위해서 프러시아에 갔었다. 1844년에 보스턴 학교위원회에 제출된 호레이스 만의 <일곱번째 보고서>는 실질적으로 프러시아적 업적에 대한 칭찬과 어떻게 우리도 그런 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는 논의에 바쳐져있다. 프러시아의 교육에 대한 빅터 커즌의 책은 그 무렵 우리나라의 화제였다. 그후 겨우 25년이 지나서 프러시아가 프랑스를 간단히 무찌르고 독일통일이라는 기적을 이루자 이민으로 이루어진 우리의 사회계층을 통합하는 것은 프러시아식 학교교육을 통해서일 것이 분명한 것으로 보였다.

1905년까지는 프러시아에서 훈련받은 미국인이나 그런 사람에게서 배운 존 듀이같은 미국인들이 모든 새로운 과학적 교사양성기관, 즉 컬럼비아 사범학교, 시카고대학, 존스 홉킨스, 위스콘신 대학, 스탠포드를 장악하고 있었다. 프러시아식 비전과 독일철학과 교육학이 주도적인 것임은 미국 학교교육의 지도자들 사이에 기정사실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교과과정에서 지성적인 내용이 제거된 것은 독일식의 방법에 의해 정당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으로 우리의 아이들이 생각할 줄 모르게 된 것이다. 지휘요원에게만 생각하는 훈련을 시키는 것 -그것이 프러시아식이다. 새로운 프러시아식 미국 학교기계의 건축가들을 가장 열광시켰던 사람들은 헤겔이라는 독일 철학자와 빌헬름 분트라는 독일 의사였다. 분트의 실험실에서 정신물리학(오늘날 우리가 실험심리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의 기술들이 다듬어졌다. 그의 작업 덕택으로, 약간의 상상력만 있으면 무시무시한 새로운 세계가 나타나는 것을 볼 구 있게 되었다. 분트는 그의 미국인 학생들에게 사람이란 복잡한 기계에 불과하다고 그럴듯하게 논증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인간이 기계라고? 그러한 암시는 전통과 문화, 도덕성, 종교 같은 고래의 속박으로부터의 해방을 약속하는 것이었다. 적응이라는 것이 학교와 사회복지기관들의 모토가 되었다. 분트에게서 직접 사사받은 G.스탠리 홀(그는 존스 홉킨스의 교수로서 뛰어난 학생 존 듀이에게 독일 바이러스를 접종시켰다)은 이제 독일에서 훈련받은 동료이자 컬럼비아 사범대학 교수인 손다이크와 합세해서 전국적으로 표준화된 시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홀은 약삭빠르게 오스트리아인 의사 지그문트 프로이드의 미국여행을 주선했는데, 그것은 거의 모든 부적응의 원인은 부모와 가족이라는 프로이드의 이론이 널리 유포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더욱더 아동들이라고 하는 '작은 기계들'을 안전한 학교에 데려다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교육사상에 세뇌된 사람들의 생각에 과학적 교육은 일차적으로 사람들을 강제로 적응시키는 방법이었다. 미국의 학교교육이 나아갈 길은 그런 '기술적'인 목표를 염두에 두고 결정되었다. 그리고 특히 록펠러와 카네기가 재단들로부터 막대한 재정적 지원을 받아서 교사양성을 위한 새로운 과학적인 대학들이 설립되었다. 프러시아에서는 이런 학교가 교사 신학교라는 타당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미국의 세속화된 종교가들은 더욱 신중했다. 훈련된 직업인으로 구성된 교육 사제들은 새로운 학교-교회를 수호하고, 그 법전을 국가의 법률에 써 넣고자 했다.


국가를 위해서

프러시아의 교사훈련은 세 가지 명제에 기초하고 있는데 그것을 미국이 나중에 빌려왔다. 첫째는 국가가 아이들의 유일하고 진정한 부모라는 것이다. 생물학적 부모는 자녀들의 적이라는 것이다. 독일의 프뢰벨이 유치원을 고안해냈을 때 그가 생각한 것은 아이들을 '위한' 정원이 아니라 아이들로 구성된 정원이었고, 그곳에서  국가가 임명한 교사들이 아이들을 다듬는 정원사가 되는 것이었다. 유치원은 아이들을 어머니들로부터 보호하도록 의도된 것이다.

프러시아 학교교육의 두번째 명제는 국가적 교육의 목적은 지적 훈련이 아니라 복종과 예속이라는 것이다. 사실, 지적 훈련이 엄격하게 통제되지 않으면, 그것은 예외없이 복종을 뒤엎어버릴 것이다. 의지를 꺾어놓을 수 있으면, 다른 것은 모두 따라올 것이다. 우리의 청교도 식민지 주민들간에 아동양육의 중심적 논리는 의지를 꺾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러면 여러분은 프러시아의 종자와 청교도의 토양 사이에 존재하는 자연스러운 유사성을 보게 될 것이다. 거기로부터 강제적 학교교육법이 나오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영국과 독일의 상류계층 사람들이 아이들의 의지를 파괴하는 데 가장 흔히 사용한 방법은 어릴 때에 아이를 부모와 떼어놓는 것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그것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의 경찰력이 후원해주었다. 그러나 위협으로 복종을 강요하는 것은 충분치 않았다. 아이가 그 합성품 부모를 사랑하게 만들어야 한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의 주인공이 국가를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배신하고 나서 자신이 '큰 형님'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프러시아식 교육의 결과가 극적으로 구현된 것을 보는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연인인 국가를 위해서 가족도 친구도 문화도 종교도 기꺼이 팔아치우려는 태도를 만들어낸다. 12년 동안 교실에 감금되어 독단적인 벌과 보상을 받으면 어떤 아이라도 검열의 권한을 휘두르는 사람이 진정한 부모이며, 수업시간을 알리는 종을 통제하는 사람이 하느님이라고 믿게 된다.

프러시아식 훈련의 세번째 명제는 교실과 작업장은 단편적인 조각들로 단순화되어 아무리 바보라도 기억하고 작업할 수 있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부터 있어온 지도력의 딜레마를 해결한다. 즉, 노동이 제기능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이 정신이 아니라 습관뿐이라면, 비순종적인 노동력은 생산에 손해를 입히지 않고 재빨리 대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은 최근 항공관제사들의 전국적인 파업시 효과를 나타내었다. 이들 이른바 '전문가'라고 하는 노동집단이 전부 밤 사이에 관리직 직원들과 급히 훈련된 보결요원들로 대체되었다. 그렇게 되어도 사고가 늘어나지 않았다. 어떤 특정한 일을 누구라도 할 수 있다면, 고용인들의 충성심과 의존도를 보장하기 위해서가 아니고는 그들에게 많은 돈을 지불할 이유가 없다.

교실에서의 훈련과정에서 모든 것은 세밀한 관리통제하에서 조각조각으로 분리된다. 이렇게 하면 학생들이 배워나가는 것을 양으로 환산하여 정확하게 등급을 매길 수 있게 된다. 대단히 아이러니컬한 것은 점수와 보고서가 측정하는 것이 지적 성장이 아니라 권위에 대한 복종이라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표준화된 시험점수와 실제 수행능력 사이에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이 자꾸 드러나는데도 이런 방법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학교에서 측정하는 것은 학생의 유순함이고, 이러한 측정은 상당히 정확하게 이루어진다. 누가 고분고분하고 누가 그렇지 않은가를 아는 것이 정말 가치있는 일일까?

마지막으로, 만일 노동자나 학생들이 자신들의 역할이 전체 속에 어떻게 맞아들어가는지 모른다면, 그들이 결정을 할 수 없고, 채소를 키우지도, 집을 짓지고, 혹은 스스로 즐기기조차도 못한다면, 그때는 정치적, 경제적 안정이 지배할 것이다. 왜냐하면 신중하게 선별하여 길들인 지도자들만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것이기 때문이다. 보통의 시민들은 어디에서 대답을 찾아야 할지는 말할 것도 없고 무엇을 물어야 할지도 모를 것이다. 이것은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는 부모들이 기대하는 것은 전혀 아닐지 모르지만 실로 정교한 교육학이다. 학교교육이 세속의 종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러분이 미리 생각된 생각들과 받아들인 지혜와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생각을 할 능력이 있다면 여러분도 같은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학교교육은 우리의 공식적인 국가종교이다. 그것은 결코 중립적인 학습 수단이 아니다.


학교와 산업질서

우리가 아이들에게 하고 있는 이 미치광이 짓은 점점 증가하고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에서 명백히 드러나고 있는 만큼 당장 중단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잡는 일을 결정적으로 막고 있는 것이 있다. 학교가 가장 거대한 비즈니스가 되어버린 것이다. 보호해야 할 일자리며 직위며, 경력이며 특권이며 각종의 계약들이 생겨난 것이다. 하나의 국가로서 미국은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어떤 합의를 이룬 일이 없었다. 합성품 국가로서 미국은 오직 경제적 합의만을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들이 부자가 되고 싶어하거나 부자인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만듦으로써 통일성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학교교육 같은 찬란한 경제기계가 일단 돌아가고 있으면 그것을 멈추거나 그 금빛 오르막길에서 내려가려고 하는 사람은 오로지 광인뿐이다. 사실 학교의 일자리는 돈을 많이 지불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자세히 조사해보면 학교들이 대부분의 일자리보다 돈을 많이 지불한다. 그리고 복종적인 사람들을 위한 보장으로는 더할 나위 없다. 왜냐하면 학교가 혼란스러운 사회적 유동성에 결국 억지력으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호레이스 만, 헨리 버나드, 윌리엄 해리스, 에드워드 손다이크,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 스탠리 홀, 찰스 저드, 엘우드 커벌리, 제임스 러셀 등 미국 역사의 모든 위대한 학교교육자들은 산업가들과 미국의 오래된 저명한 가계들에게, 새로운 프러시아식 체제를 후원하면 이곳에서의 혁명의 가능성은 사라질 것이라고 끊임없이 약속을 했다. (혁명으로 이루어진 나라에서 또하나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보장이 지도자들에게 가장 호소력이 있다는 것은 정말로 아이러니가 아닌가!)
학교는 새로운 산업질서를 위한 보험정책이 될 것이었다. 그런데 산업 질서는 따지고 보면 미국의 가족과 소농과 자연환경과 공기와 물과 공동체생활의 종교적 기초, 그리고 미국인은 자신의 노력에 의해 성공도 실패도 할 수 있다는 유서깊은 약속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이 산업질서는 민주주의 그 자체와 보통의 남자와 여자들에게 한 약속, 즉 만일 위정자가 그들을 궁지에 몰아붙이면 투표로 당장에 상황을 바꾸어놓을 수 있다고 한 약속을 파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은 노동현장과 학교에 대한 이 프러시아식 이론이 단순히 어떤 역사적 기현상이 아니라, 통상적인 교과서 구조와 학습과정을 설명하는 데 필수적인 것임을 알게 되었기 바란다. 그것은 실제로 사람들이 무엇을 배우는 방법에 반대되는 것이다. 그것은 록펠러와 카네기 재단들이 초기의 강제적 학교교육을 표준화된 공장의 모델을 따라 만드는 데 왜 과도한 관심을 가졌던가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 미국문화의 많은 신비스러운 면을 밝혀준다. 예컨대, 민주주의 사회인 이 나라에서 시민이 출생과 동시에 자동적으로 투표권자로 등록될 수 없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강제적 학교교육은 처음부터 대중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주입시키려는 계획이었고, 그 중요한 부분은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확실한 과학적 학교교육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오귀스뜨 꽁뜨에 의하면, 아이들과 그들의 가족, 공동체, 하느님, 그리고 그들 자신 사이의 연결을 끊어버림으로써 쓸모있는 프롤레타리아트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기소외야말로 성공적인 학교교육의 열쇠라고 한 윌리엄 해리스의 신념을 기억하는가? 물론 그렇다. 믿을 수 있는 시민을 만들어내려면 이러한 연결들이 파괴되어야 한다. 그것들이 존속한다면 충성심은 예견할 수도 없고 관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흔히 "내가 죽기 전에는 안돼"라고 말한다. 이렇게 된다면 어떻게 국가가 기능을 할 수 있겠는가?

정부가 행하는 학교교육은 무해한 프롤레타리아트를 만들어내도록 고안된 거대한 행동교정 진료소이다. 이 프롤레타리아트의 가장 중요한 부분은 법률가, 의사, 기술자, 경영가, 정부 사람들 그리고 학교교사라는 '전문적인' 프롤레타리아트이다. 빈민이나 극빈자보다더 더 의지할 곳 없는 이 전문적인 프롤레타리아트는 사치와 안전에 중독이 되어서, 그리고 정부에 변화가 있으면 자기들의 독점적 면허권에 변화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볼모로 붙들려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제공하는 주된 서비스인 조언은 사사로운 이해관계로 오염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그 조언들 때문에 죽어가고 있고, 전문가 프롤레타리아트 자신들이 누구보다도 더 빨리 죽어가고 있다. 그토록 규칙적으로 문자 그대로의 자살을 하는 아이들은 그들의 자녀들이지 빈민들의 자녀가 아니다.


표준화된 훈련과 인간

 각 장의 끝에 질문들을 인쇄해 넣는 것은 교과서가 교사의 영향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한 방법이다. 우리는 너무도 오래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아무도 그 밑에 있는 기본 전제를 검토해보거나, 그것이 장기적으로 초래할 지적 주체성의 손상을 알아보지 못한다. 과학교사들이 실제의 과학자들이 아닌 것처럼 문학교사들은 독창적인 질문을 하는 독창적인 사상가가 아니다.

1926년 버트란드 러셀이 미국은 인류역사상 아이들에게서 비판적인 사고의 수단을 의도적으로 빼앗은 최초의 나라라고 말했다. 사실은 프러시아가 최초이고, 우리는 두번째이다. 학교용으로 만들어진 <모비딕>이 옳은 질문을 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내던져버렸다. 진정한 책은 그런 짓을 하지 않는다. 독자가 자기자신의 질문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진짜이다. 들어야 할 가장 좋은 질문들을 보여주는 책들은 그저 어리석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마치 표준화된 시험이 그런 것처럼 도움을 준다는 핑계로 인간지성을 손상시키는 것이다.

학교교육을 잘 받은 사람들은 학교용 교과서처럼 서로 엇비슷하다. 선전가들은 이미 백년 전부터 학교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무지한 사람들보다 이끌어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디트리히 본회퍼가 나치즘에 대한 연구에서 확인했듯이.

우리의 학교교육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생각하고 어떻게 생각하고 언제 생각할지를 가르치는 것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아주 쓸모있다. 또, 전문가에게 의존적으로 되고, 직함의 뒤에 있는 실제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직함에 반응하도록 아이들을 훈련하는 것이 어떤 집단에게는 아주 쓸모있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과 이웃, 문화와 종교를 위해서는 대단히 건강하지 못하다. 그러나 학교는 어차피 그런 것들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는 가족이니 문화니 하는 것들이 없는 것이다.


성공적인 학교가 문제

내 생각에는 오늘날 학교를 움직이고 있는 압도적인 대다수가 어때서 돈을 아무리 많이 들이고, 아무리 선의를 가지고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하여도 성공적인 인간을 배출하지 못하는지 그 까닭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공정할 듯하다. 그러니가 나쁜 교수방법, 나쁜 부모, 나쁜 아이들 또는 인색한 납세자들 등 비난할 대상을 찾으려는 유혹을 불가피하게 받는 것이다.

학교가 본래 의도되었던 그래도 작용하고 있으며 그것이 만들어내려고 의도한 바로 그런 인간제폼을 생산해내고 있는 아주 잘 고안된 사회기구라고 보는 관점에서는 실패의 원인은 전혀 다른 데 있는 것이다. 학교를 인간 재간의 승리이며, 영광스러운 성공이라고 본다면, 우리는 우리가 정말 이런 성공을 원하는지 숙고해보아야 하고, 그렇지 않다면 그 대신 가치있는 그 무엇을 구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수십수백 개의 올바른 방법들이 아니라 하나의 올바른 방법을 찾아낼 수 잇을 만큼의 충분한 국민적 합의가 존재하는지 물어보아야 한다. 나는 거런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학교와 도서관의 차이

박물관이나 도서관은 학교와는 다른 식으로 움직인다. 도서관 사서와 학교 교사의 차이점을 생각해보라. 사서는 진짜 책과 진짜 독자들을 관리하는 사람이고 교사는 교과서와 계약된 독자들을 관리하는 사람이다. 그 차이 속에 진짜 교육과 학교교육이 어떻게 다른지를 밝혀주는 로제타 돌이 있다.

도서관의 분위기와 구성을 먼저 살펴보자. 내가 방문해본 전국의 도서관은 모두 책을 읽는 척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책을 읽을 수 있는 편안하고 조용한 장소였다. 이 정적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 학교는 조용할 때가 없다.

도서관에서는 연령별로 격리된 아이들이 아니라 모든 연령층의 사람들이 함께 있다. 어떤 이유에선지 도서관은 독자들을 나이별로 또는 독서능력이라는 수상쩍은 기준으로 격리하지 않는다. 농사나 숲이나 바다의 비밀들을 알아낸 사람들이 나이나 시험점수로 격리 수용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도서관은 인간공통의 판단력이면 대부분의 배움에 적합하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았던 것 같다.

사서는 무엇을 읽어라, 어떤 순서로 읽어라 하고 말하지 않고, 또 나의 독서에 점수를 매기지 않는다. 사서들은 그들의 고객을 신뢰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사서는 내가 나 자신의 질문을 하도록 허용하고 내가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지, 도서관이 나에게 필요한 때라고 결정한 때에 도와주지 않는다. 도서관은 일정한 간격으로 종을 울려서 책읽기를 중단하라고 종용하지 않는다. 도서관은 또 내 집을 기웃거리고 들여다보지도 않는다. 도서관은 나의 부모에게 도서관에서의 내 행동을 알리는 편지를 보내지 않는다. 도서관 밖에서 시간을 어떻게 보내라고 추천을 하거나 명령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도서관에는 성적평가제도가 없다. 모든 사람이 뒤섞여있는 판에 각 개인의 성공과 실패의 내용을 담고 있는 자료가 있을 리 없다. 내가 원하는 책이 있으면 그것을 요청해서 볼 수 있다. 그 때문에 나보다 능력이 나은 독자가 잠시 후에 와서 그 책을 볼 수 없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도서관은 우리들 중에 누가 더 그 책을 읽을 자격이 있는지 결정하려 하지 않는다. 도서관은 특혜를 베풀지 않는다. 도서관은 사회계층이나 재능의 유무에 상관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도서관이야말로 미국의 역사적인 정치적 이상을 잘 반영하고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는데, 그에 비하면 학교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공공도서관은 학교처럼 공공연히 창피를 주는 일을 하지 않는다. 좋은 독자와 나쁜 독자들을 등급을 매겨서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써붙이지 않는다. 아마도 도서관은, 훌륭한 독서는 그 자체로서 보상이 되는 것이니까 표창까지 덧붙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훌륭한 독서를 나쁜 독자들을 위한 도덕적 자극제로 쓰고 싶은 유혹을 물리친 것 같다. 적어도 뉴욕 시에서, 도서관과 학교의 가장 이상스러운 차이점은 도서관에서는 나쁜 행동을 하거나 총을 휘두르는 아이를 볼 수 없다는 점이다. 나쁜 아이들도 얼마든지 도서관에 들어갈 수 있는데도 말이다. 나쁜 아이들은 도서관을 존중하는 것 같다. 이 흥미로운 현상은 도서관이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보여주는 존경심에 대한 무의식적인 반응일지 모른다. 책을 읽기 싫어하는 사람들도 때때로 도서관을 좋아한다. 사실, 도서관은 일반적으로 그토록 멋진 곳이기 때문에 나는 왜 우리가 그것을 강제적인 것으로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또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도서관은 나의 독서습관으로 미루어 나의 장래에 대한 예견을 하지 않고, 또 내가 바바라 카트랜드를 읽지 않고 세익스피어를 읽으면 더 행복해질 거라고 암시하지도 않는다. 자유로운 사람들은 흔히 몹시 괴팍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도서관은 괴팍한 독서습관을 너그럽게 보아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서관은 학교용 교과서가 아니라 진짜 책을 가지고 있다. 그 책들은 여러 사람의 공저가 아니며 정치적으로 올바른 선정위원회가 뽑은 것들도 아니다. 진짜 책들은 각 저자의 개인적 커리큘럼에 따른 것이지, 독일의 어떤 집단이 짜놓은 보이지 않는 교과과정에 따른 것이 아니다. 아동문고들은 예외지만, 그러나 지각이 있는 아이들은 그런 것들을 읽지 않으므로 아동문고의 피해는 아주 적다.
진짜 책들은 집단화에 대해 몹시 반발한다. 그런 책들은 군중행동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책이야말로 독자를 다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절대적인 고독의 동굴 깊숙이 데리고 가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책은 어떤 두 사람도 똑같이 읽을 수는 없다. 진정한 책은 통제할 수 없는 정신적 성장을 일으키기 때문에 -그리고 그것은 감시될 수가 없기 때문에- 전체주의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런 책을 혐오한다.

텔레비전은 집단적인 매체이고 그런 점에서 교과서보다 훨씬 우월하기때문에 교실 속에 들어왔다. 마찬가지로 슬라이드, 오디오 테이프, 집단 게임 등이 대중적 학교교육의 중심목표인 집단화의 필요를 충족시킨다. 이것이 학교들이 그토록 잘하는 그 유명한 '사회화'이다. 한편, 학교용 교과서는 명령에 따르는 훈련, 공공의 신화, 끝없는 감시, 전세계의 서열화 그리고 끊임없는 위협이라는 학교의 판에 박은 일상생활을 강화하는, 종이로 만들어진 도구이다. 그것이 각 장의 끝에 있는 질문들이 하도록 의도된 일, 즉 여러분이 예속되어 있는 현실 속으로 당신을 다시 데려오는 일이다. 아무도, 교사들조차도 당신이 그런 질문에 대답을 할 것으로 기대하지 않는다. 그 질문들은 그저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 해를 끼친다. 그것은 천재적인 수법이다. 교과서는 군중통제의 수단이다. 아주 순진한 사람과 아주 학교교육을 잘 받는 사람만이 좋은 교과서와 나쁜 교과서의 차이를 알아보지만, 실은 두 가지가 하는 일이 똑같다. 그런 점에서 교과서는 텔레비전의 프로그램 구성과 아주 비슷하다. 마취제로서의 텔레비전의 기능 그 자체야말로 좋은 프로그램과 나쁜 프로그램 간의 하찮은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이 강력한 것이다.

진정한 책은 교육을 하고 학교 교과서는 훈련을 시킨다. 따라서 도서관들과 도서관 정책들은 학교교육의 개혁을 위한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교육에서 자유로운 의지와 고독을 빼버리면 그것은 훈련이 되고 만다. 교육과 훈련은 양립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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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에 대하여  (0) 2008/11/02